용서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저는 운동을 할 때,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자주 외칩니다. 예를 들어서, 축구할 때는 같은 팀원에게 끝까지 공을 따라가라고 외치고, 탁구 칠 때는 지고 있을 때에 스스로에게 “포기하지마!”라고 외치곤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영성이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면 용서가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나에게 해를 가했을 때에도,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용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성도님들에게 가장 바라는 덕목이 바로 용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관계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룹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 대로 갚기는 하셨지만, 주님은 또한,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시99:8). 하나님은 죄를 그냥 적당히 넘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국은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 아버지의 미덕, 용서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장할 수록 용서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떤 분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용서하고 넘어가더군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왔는지 모릅니다. 용서는 신앙 성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C.S. 루이스는 < 순전한 기독교>에서, ‘용서’는 이 시대에 가장 인기없는 주제라고 말하면서, ‘용서’ 만큼 모든 사람이 칭송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용서하지 않는 이상한 주제도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이 지속되려면, 용서는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사랑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잘 해나가다가도 다툴 수 있고 의견의 불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싸우다가도 다시 화해하는 데, 나이가 들 수록 다시 화해하는 일이 어려워집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게 잘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늘 의아했고, 이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C.S.루이스는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는, 용서하기 쉬운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철천지 원수와 같이, 정말 용서 하기 힘든 사람 말고, 작은 용서부터 시작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용서에 자신이 붙고 점점 더 용서가 몸에 베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는 용서의 감정 때문에 아니라, 용서의 결단 때문에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완전히 이해되고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기로 결정하면 용서의 감정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안그런데 용서한다는 것은 거짓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것이 위선이 아니라 용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우선, 용서가 어려운 것은 나 뿐만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에 위로가 되었고, 처음부터 원수를 용서하지 못해도 괜찮겠구나…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 하는 생각이 드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감정이 안따라와도 일단은 용서하기로 결단하는게 중요하구나…. 저에게 꼭 필요한 설명이었던 것같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었고,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주님이 날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용서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됩니다. 용서의 마음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를 용서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용서가 차마 안되더라도, 적어도 용서를 해야하는데… 하는 마음은 들기 시작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용서가 있는 공동체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실수해도 다시 시작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용서가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 김해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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